다음은 2003년 11월 한달간 부산일보에 기고했던 일기 형식의 짧은 글들입니다
쉬우면서도 행복해지는 일
늦은 아침을 먹고, 게으름을 피다가 -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걸어서 작업실까지 가기로 했다
도심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나의 집과 작업실의 거리는 걸어서 3,40분.
매번 작업실에 가져갈 짐 핑계, 시간 핑계 대며 걷기를 포기해 왔었다.
난 지금 걷고 있다.
골반 뼈의 삐걱임, 팔 관절의 규칙적인 흔들림을 느낀다.
몸으로서의 나를 생각한다.
입을 나라고, 혹은 머리만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손가락도, 발가락도, 엉덩이도 모두 나인데.
늦가을의 찬 공기가 기분 좋게 뺨에 부딪힌다.
오늘 같은 날은 제법 멀리 있는 산도 원근감을 잃고 내 눈앞에 바짝 다가선다.
채도100%의 낙엽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빙글 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비단길을 깔아준다.
황송해진 난 입을 다물 줄 모르면서, 겸손한 그들의 입맥들, 나무줄기의 버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얼마 전부터 허리춤에 차기 시작한 만보기의 수치도 기분 좋게 올라간다.
'좋다. 좋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제법 다리가 뻐근하다.
라디오를 켜고,
또다시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