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3년 11월 한달간 부산일보에 기고했던 일기 형식의 짧은 글들입니다
총12편의 글 중 3번째 글입니다.
보약보다 좋은 수다
빨래를 널러 마당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 이상은 전화 통화를 하는 선배언니로부터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작업실 아니고 집인가?" "응 빨래 너는 중이지" "그래 오늘 햇살 참 좋다"
이렇게 시작한 통화는, 휴대폰을 왼쪽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아슬하게 끼어둔 채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 난 빨래도 다 널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내친 김에 마당 바깥쪽에 난 길을 따라 내려간다
물론 얘기는 계속된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손에 길다란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고
하릴없이 그 녀석을 가지고 쌓여진 낙엽더미를 이리저리 쑤셔대고 있다.
휴대폰이 뜨끈뜨끈 하다.
특별히 긴장된 삶을 살지 않는 대부분의 그림하는 이들은 이처럼 전화 수다를 즐기는 것 같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비롯,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전화수다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휴대폰, 시외전화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처럼 전화 수다를 즐기다보니 그에 따른 시간 안배나 기술들이 늘어나 통화중에 스케치 하기, 붓질하기, 라면 끓여먹기 등이 가능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정도이다.
1시간도 모자라 2시간, 때로는 그 이상을 그렇게들 시시콜콜 하면서도, 때로는 꽤 깊이가 있으면서도, 또 그렇고 그런 얘기들을 끊임없이 주고 받는다.
다른 예술 작업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리기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작가 혼자서 씨름하는 것이어서 ,조금 지치거나 무료해졌을 때 값싸고 시간도 절약되는 대리 선술집 역할을 전화라는 녀석이 하는 것이다.
평소에 과묵해 보이는 화가들도 거의 예외없다.
단지 그 말의 속도만 좀 느릴뿐이지-.
즐거운 수다. 화가들에겐 보약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