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3년 11월 한달간 부산일보에 기고했던 일기 형식의 짧은 글들입니다
총12편의 글 중 4번째 글입니다.
내가 처음 만났던 화가
가족과 은행을 구워 먹다보니,
그 쌉싸름한 것을 구워먹었던 사춘기 시절로 난 어느새 돌아가 있다.
조용한 주택가에 우리 집은 있고,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꽤 넓은 거실이 있다.
그곳엔 온통 엄마의 그림이 세워져 있고 , 또한 그곳엔 항상 엄마가 계신다.
고3 수험생인 나는 한참 공부방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중이다.
엄만 흘러간 팝송 테잎을 계속 반복 재생하면서, 흥얼흥얼 엄마 식 영어로 따라 부르신다.
그리고 그 노래 리듬에 맞춰 거친 붓질 소리가 스윽스윽 들려온다.
내가 좀 지겨워 질 때쯤이면 ,
"정아-, 은행 먹자"
비실거리며 난 걸어나온다.
개인전을 앞에 둔 엄마는 수험생인 나보다 더 바쁘시다.
난 은행 한알을 질겅 씹으며 쭈그리고 앉는다.
"야- 엄마 많이 하셨네. 근데 이 그림은 좀 탁하다."
이윽고 난 냉정한 비평가로 돌변하고 ,엄마는 구석에 두었던 그림들까지 꺼내면서 쭉 나란히 배열하신다. 그리고 두 여자의 그림이야기는 제법 진지하게 이어진다.
이젠... , 그 거실 책꽂이에 꽂혔던 두툼하고 화질 좋은 명화집과 뭉툭하게 닳은 붓들과, 홀베인 물감들, 그리고 향긋한 테레핀 냄새는 흐린 기억 저편에 존재한다.
그리고 더 이상 엄마도 내 그림에 대해 평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 엄마와 나의 거실에서의 그 추억은 지금도 나를 화가이게 하는 강한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