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1.나무가 된 숙사의 선인장과 제라
2.전시장에서 셀프카메라
3.한 술집에 걸려있던 일본 전통 그림
후쿠오카 여행기-넷째날
새벽에 밤을 샜던 학술팀들이 들어와 잘 준비를 했고
티나와 성진씨는 아침 배를 탈 준비를 했다.
아침부터 어수선한 탓에 나도 아침 단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숙소 복도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두 명을 배웅했다.
나도 내일이면 갈 사람이지만 먼저 보내는 마음은 왠지 찡했다.
엊저녁도 씻는 걸 포기했건만 오늘 아침도 역시나 찬물 세수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냉기가 감도는 화장실에 나무 슬리퍼(거의 나막신 수준)를 신고 들어가다 꼬꾸라질 뻔했다.
한동안 너무 편한 여행만 했었나? 이 정도에 투덜거리다니...
머리가 으깨지는 고통을 참으며, 정수옥 선생은 머리를 감은 뒤,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갈아 입으셨다.
오늘은 부산미학미술사연구회의 학술발표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정선생이 꽃단장하는 동안 영준씨와 나는 숙소 현관 밖에서 기다리며 정원의 오래된 선인장과 제라늄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얘들도 시간이 흐르면 이렇게 나무가 되는구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어제보다는 좀 더 쌀쌀해진 것 같았다.
정선생은 연구회 대표로서, 영준씨는 오늘 발표회 사회를 맡아서(일본어 잘하는 죄로) 오후에 둘 다 바빴다.
결국 전혀 일본어가 안 되는 내가 오늘 전시 당번을 서 기로 했다.
둘 다 하루씩 당번을 선 터라 미안하기도 했다.
남는 오전 시간동안 두 명은 책과 화구를 사러 시내에 갔고 난 전시장에 남았다.
일본어는 거의 백지 상태인데다가 영어실력도 별로라 좀 걱정은 되었지만,
뭐 어찌 되겠지...
<직설적이고 소박한 대화들>
오전동안엔 역시나 한산했고 어쩌다 들어오는 관객에게도 벙어리처럼 미소만 지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전시장 밖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서 빌려온 책 ‘후다닥 일본어 회화’라는 포켓북을 슬며시 꺼냈다.
간단한 말부터 건네기 시작했다.
전시공간이 두 군데라 안내해 주지 않으며 못 보고 나가기 쉽기 때문에 부지런히 “다른 방에도 작품이 있습니다” 라는 말처럼 들리게 대충 일본어 단어를 읊었다. “아노 헤야~ Works 아리마스.” 엉터리였지만 그들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받았다.
영어, 일본어, 몸짓을 섞어 대충 대충 얘기하다 보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또 미션대학이라 학생들이 영어는 잘 하는 것 같았다.
또한 몇몇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나에게 한국말 현장학습을 위해 찾아와 부지런히 말을 걸며 최근의 한류스타에 대해 얘기를 하기도 했다.
남학생들은 최지우, 이영애, 김태희 같은 배우 얘기를 하기도 했고
나도 좋아하는 일본의 영화감독과 만화영화 감독등의 얘기를 하면 그들은 좀 놀라워 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정신없이 바빠졌다.
특히 시니컬해보이던 남자 대학생들이 의외로 많이 구경했는데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세련된 패션과 턱수염 뒤의 순진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시 주제가 ‘초특가 부산 투어 패키지’였기 때문에 부산의 이미지를 대화가 많았다.
특히나 ‘민락동 회 센타’ 풍경이 있는 작품을 보고는 ‘사시미 센따?!’하며 놀라워했다. 그렇게 회 먹는 건물이 대형으로 줄 지어 서 있는 걸 보고는 말이다.
그리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형식의 우리 작가들의 작품에 매우 흥미를 느껴했다.
특히 즐겁게 대화를 나눈 두 대학생이 기억에 남는데,
법학과, 영문과를 다니는 ‘겐토’와 ‘시다’라는 학생이다.
겐토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이기도 했고, 시다는 티셔츠 등에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였다.
같은 예술을 하는 처지이어서 인지 전시작품들도 매우 진지하고 흥미롭게 구경했고 질문도 많이 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하는 모습을 본 어떤 일본 여학생이 통역을 자청해 왔다. 부산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다 했다.
물론 한국어를 아주 잘 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통역 중 잠시 다른 곳을 갔다 온 사이, 우리가 손짓과 영어로 대화에 아무 문제가 없자 옆에 있던 그녀가 어느새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녀에겐 좀 미안했지만 어쩔 땐 2단계를 거치는 통역이 가지는 지루함이 좀 그렇기도 하다.
직설적이고 유치한 표현밖에 못할 수도 있지만, 눈빛을 보며 나누는 즉각적인 대화는 무엇보다 즐겁다.
하루 관광 안 간 것 보다 훨씬 유쾌한 시간이었다.
빼곡히 방명록에 기록된 글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학술발표회는 잘 치러졌다.
내가 참여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사실 전시장에 남아서 보낸 시간들이 훨씬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두 여인의 늦은 입국과 뒤풀이>
임영선과 이정자씨가 저녁 무렵 전시장에 들어섰다.
대학동기, 선배인 두 명은 나의 20년 지기 친구이다.
우연히 이번 전시에 함께 하게 되어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몹시 멀미를 한 영선은 몹시 지쳐 보였고 정자언니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왔다. 영선이가 흔들리는 파도에 몹시 괴로워할 때에도 그녀는 ,“울렁울렁하는 이런 기분, 괜찮네.”라고 했다나?
어쨌거나 새롭게 두 여인과 학술팀과 함께 주점인 ‘와라와라’에 세 번째 가게 되었다. 거의 지겨워질 지경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뒤풀이엔 서남대학의 일본인 교수 두 분과 조선족이면서 역시 이 대학 교수이신 한 교수님과 일본인 제자들 몇몇이 동석해 있었다.
큰 테이블 3개가 꽉 찼다.
나마비~루(생맥주) 컵들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날씨는 무척 추웠지만 2차 술집으로 사람들은 향하고 있었다.
학교 근처의 작은 술집이었는데 인사동 어느 주점을 연상시켰다.
주점 안에는 많은 일본식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다.
괴짜 같은 한 일본인 교수가 뭔가 큰 병을 꺼냈다.
평소 아끼던 것으로, 독사로 담은 술이었다.
아주 귀한 것이지만 우리들은 ‘엥, 독사!’하며 주저주저 했다.
물에 타서 한 잔씩 나눠줬고 사람들은 마지못해 마셨다.
맛은 괜찮았다. 다 괜찮은데 나중에 보니 유리잔속에서 핑그르 도는 뱀비늘이 갑자기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정수옥 선생과 난 비틀호를 타고 출국해야 한다.
숙소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하며 사람들이 이런 날씨로 배 못 뜬다며 겁을 줬다.
우린 대수롭지 않게 들으며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