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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소
    부산공간화랑
  • 기간
    2015.4.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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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세계
BANG, JEONG - AH

2015.4.22 ~ 5.5






남루한 삶과 현실의 은유, 그리고 저 너머

 

옥 영 식

 

방정아의 화면은 주변의 일상적인 삶의 우여곡절을 보여준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갖가지 신산한 삶과 측은한 현실을 포착하고 숨은 진실을 드러내어 성찰하게 한다. 그의 최근작은 이러한 삶의 목격자로서의 시선을 지니되, 상황을 표출하여 소통하는 화법이 달라지고 있다.

세세하게 관찰하여 그려지던 서사적 사실성의 묘사법이 이전의 화풍이었다면, 지금은 은유적 표현성의 사의법으로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전에는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고, 상황을 의미하는 장소성을 현장감 있게 재현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즈음의 작품에서는 인물보다 풍경이 우세해지거나, 아니면 장소성은 추상화되고 이미지로서의 인물만이 남는다. 더 나아가 가상공간으로의 심적 상황이 은유적으로 시각화되고 있다.

자동차 바퀴자국으로 어지럽힌 아파트 마당, 주차장에 그어진 완강한 직선과 대비한 수양버들의 나부낌, 혼탁하게 흐르는 강과 교각, 고기와 물도 없이 잡다하게 어수선한 수족관 들은 본질과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이 시대의 남루함의 시각적 표상이 아닐까. 마침내 삶의 터전을 잃고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예컨대, 그치지 않는 눈물로 슬픔에 잠긴 여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 별 볼일 없이 된 신세에 화난 여성, 온갖 수심으로 우울한 여성, 망연자실한 탁구장 아줌마들은 꿈과 희망을 잃고 좌절한 이 시대의 인간표상이라 하겠다.

가진 자들의 권력을 손과 고기에 빗된 것에 이르러서 작가의 화법은 은유법으로 바뀌고, 이미 현실적 리얼리즘은 자취를 지웠다. 그래서 작품 텁텁한 커피처럼 미묘한 느낌과 감정을 더블이미지로 중첩하여 표현하거나, 실의에 젖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간가족을 한자리에 모은 군상인물도인 ‘THE HALL’은 기존의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 파격적인 초현실의 장면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짙푸른 물빛 속에서 유영하는 해파리의 자유스런 생명의 삶에 공명하는 작품 자갈치에 이르면, 형상의 경계는 사라져서, ‘저 너머로 이어지는 미지의 시공간을 예감한 것으로 보인다.







되는 것 : , 근육 그리고 눈물

 

김만석

 

무언가가 될 때는 그냥 되는 법이 없다. 되는 것(be-coming)은 존재(be)가 새롭게 오는 것(coming)이니, 그것은 정말로 엄청난 사건이 분명하다. 경천동지란 바로 이런 사태를 일컫는 것일 터. 물론 어떤 무언가의 새로운 출현이 반드시 세계 전체의 격변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일상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없거나 잘 지각되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소한 삶에서도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몸은 그러한 생성의 최전선일 터이다.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몸, 뼈와 근육 그리고 피가 무언가가 되도록 만드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

회화 역시 어떤 형상이 캔버스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회화적 뼈와 근육, 피가 잘 돌아야 생기와 온기가 형성되고 그것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림이 되는것은 온 몸의 운동을 경유할 때에야 겨우 가능해지며 그러한 각고의 운동을 통해 캔버스에는 가까스로 어떤 시간의 두께가 쌓인다는 말이다. 이미 있는 것의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 그러므로 형상의 반복 그리고 그 반복 내에 깃든 차이가 세계의 문턱을 형성할 것이다. 회화적 되기란 그런 점에서 이중의 운동을 동시적으로 경유해야만 한다. 캔버스의 바깥에서 접속하는 그리기의 에너지와 캔버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적 뼈와 근육 그리고 피 말이다.

따라서 방정아가 걸어온 회화적 반복들은 무엇인지를 그것이 어떤 문턱을 넘는 차이인지 물어야 한다. 일상과 일상을 사는 존재들은 방정아의 그림에서 매우 중요한 반복이다. 이 반복이 이번 작업에서는 (젖어 사용할 수 없게 된 연탄을 활용한) 마티에르라는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의미심장한 방식이다. 연탄은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항상 불꽃과 만남으로서, 타오르거나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으로 다른 세계를 생성한다. 그러나 연탄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여름 장마로 젖어버린 것으로, 더 이상 무언가로 되기 어려운 것으로 버려질 수 있었지만, 이를 회화적으로 도입하여, 타오를 색으로 전환한다.

그러니까, 방정아는 연탄의 타오름이 대체로 소진으로 끝나버리지만, 방정아는 이를 강렬한 색과 접속시킴으로써 회화적 불꽃으로 전환시킨다. 이 회화적 연탄을 통해 방정아는 캔버스 속 인물들(이미 저물어가는 중년들이나 타올라야 하지만 울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여, 그들의 삶과 생을 그 어떤 것들로 치환할 수 없는 독특한 삶으로 만든다. , 방정아는 식어버린 존재들에게 뼈와 근육 그리고 피를 제공함으로써, 그 존재들을 불꽃으로 ()발명하는 캔버스를 조성한다. 그래서 이 캔버스가 생산하는 열기가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달리 생산할 수 있다(다른 것)고 생각하는 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잠재로서 사건들, 혹은 의미들

 

강 선 학 kang, sunhack

해파리가 둥둥 떠 있는 자갈치 부둣가에서 담배를 물고 섰거나, 오늘 결국 잘렸다고 핸드폰에 대고 쌍소리를 해댄다. 참을 수없이 눈물이 그치지 않거나, 자신의 모습이 헝클어진 머릿결처럼 겹쳐 보인다. 이들 작품은 성격과 정황이 분명하고 묘사에 완결성을 보였던 방정아의 그동안 태도와 사뭇 다르다. 거친 색 면들이 사물의 사실성을 누르고, 색과 선들은 그 위를 탐색하듯 떠돌고 웅성거리며 사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번 접근은 특정 장면의 정황과 메시지 읽기에 앞서 대면을 요구한다. 그 대면은 소문처럼 온갖 것들로 움직이고 가지 치는 것들과의 만남이다. 어떤 상태로 어떤 것들이 완성될 것인지를 유보한 만남이다. 화면은 선과 색의 자율성, 외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통상적 형상을 거부하고 사물 자체의 의지를 보인다. 미완의 사건으로 내던져진 화면은 대상의 재현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사물이 드러나는 시간성을 보게 한다. 사물의 존재보다 생성 중인 어떤 것, 동사로서의 사물의 이미지를 찾게 한다.


통상적으로 재현이 강조되는 작품은 우리 사유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향해 질주할 뿐 그 사이의 여정에 관해서는 느슨한 태도를 보인다. 여정에서 생기는 내 안의 잠재는 무시될 뿐 목적지에 모든 것이 종속된다. 그래서 재현은 때로 우리에게 특정 이념을 강요하고 재현의 정치학을 들먹이게 한다. 방정아의 작업 역시 그 나름의 세계, 이야기, 이야기의 방법을 가졌고 성과와 평가를 얻었다. 그의 표현 의지는 분명했고 형상은 그를 따랐지만 통상적 재현의 위험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전에서 정황을 보는 시간의 의외성은 그동안의 방법과 내용에서 다른 지점을 보아낼 수 있는 전환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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