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멀리, 좀더 가까이 - 삶과 소통하는 풍경들
- 방정아의 네 번째 개인전에 부쳐 -
조선령(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은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할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너무 본질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말을 꺼내는 것조차 너무 새삼스럽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방정아의 이번 개인전 작품들을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들은 바로 ‘소통’의 문제였다. 물론 모든 미술작품은 관객을 상정하고 있는 이상 언제나 소통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확대해서 말하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예술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통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방정아의 작업이 바로 그렇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보면 그의 작업이 매체비판적 성격을 띤다던지 모더니즘적 실험의 연장에 있다던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 되겠다. 그의 작품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으며 형식미보다는 내러티브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차원에 그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방정아의 작업이 소통지향적이라는 말은, 그가 항상 그림을 통해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이다. 자전적인 광경을 그릴 때도 그의 작업은 내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이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지향하고 있다. 한 명의 등장인물만이 나오는 작품에도 화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타인의 존재가 느껴진다. 사실 우리의 삶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을 넘어서기 때문이며, 타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나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의 소통이란 본질적으로 모호한 것이다. 그것은 자족적이고 폐쇄된 두 자아 사이에서 개념이나 정보가 전달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 소통은 개별적인 자아의 차원을 넘어가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하고 타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며, 결국 타자가 나와 함께 존재하는 새로운 지평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정아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통방식 역시 이러한 지평의 차원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 지평 혹은 조건에서 보면 객체와 주체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리얼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의(어쩌면 전혀 다른 의미의) ‘리얼함’이 있다. 어쩌면 삶에 육박해들어갈수록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명징함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인지도 모른다. 방정아의 이번 작업들에서 예전보다 더 모호하고 언뜻 추상적으로 보이는 화면이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징후라고 보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의 작업 속에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가까워진다”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개인의 묘사에서는 멀어지지만 전체적인 ‘조망’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삶의 지평 혹은 조건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이번 개인전의 작품들이 이전 스타일과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조각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작가의 경향은 여전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간간이 보이던 변화된 경향도 관찰할 수 있다. 도식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90년대 초반과 중반까지의 작업들은 고단한 여성의 삶을 다루건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하건 구체적인 삶의 제스처를 주로 중, 근거리의 시점에서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좀더 ‘멀리서 본’ 시선이 중심이 되고 있다. <엄마 어부바> <미션 임파서블> <천천히 동백섬을 걷다> <고요해지는 마음> 등이 그런 예이다. 사람은 조그맣게 보이거나 뒷모습을 보이고 있고 풍경이나 건물, 상황이 전면에 등장한다. 단적인 예로 <엄마 어부바>에서는 광안대로와 해변의 넓은 풍경 한가운데 아이를 업으려고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일시적이고 구체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조망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개나리 만발하다> <종로 3가 오후 4시 30분>등의 작품은 근경을 그리고 있지만 그 느낌은 오히려 예전작업보다 <엄마 어부바>와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개나리 만발하다>에서 여자의 포즈에는 설명이 적어서 순간의 긴장이나 속도감을 별로 유발하지 않는다. 동작이나 표정의 세세한 포착이 엷어지면서 지시적인 의미는 엷어지는 것이다. 격렬함이나 구체성이 약해지는 대신 좀더 긴 호흡을 가진 여유로움이, 그리고 때로는 모호하고 거의 상징적인 느낌의 상황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변화는 그렇게 급격한 것은 아니다. 이번 개인전의 작품 중에서도 <새로운 시선> <와이셔츠 깃 다리기>처럼 과거 작업과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도 있으며 한 작품 안에서도 그런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섞여 있기도 한다. 지점토 작업인 <동심초>가 그 한 예이다. 이 작품은 반짝이 스팽글을 단 화려한 의상과 프로가수같은 몸짓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꿈과 현실, 순간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을 중첩시키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은 <복귀>나 <관리되는 공포>와 같은 작품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복귀>는 작가가 송도의 거북섬 안에 방치되어 있는 횟집의 폐허를 그린 커다란 작품이다. 화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른 쪽에는 기둥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이고 중앙에는 부서진 타일과 무너진 벽이 있는 내부의 풍경이, 그리고 왼쪽에는 좀더 멀리 섬 건너편의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세 가지 풍경은 한데 얽혀있고 내부와 외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마치 어안렌즈로 본 것처럼 가운데가 부풀어오른 파노라마식의 풍경이다. 묘사는 매우 치밀하지만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디테일을 과장하는 편에 가까우며 전체적으로 거의 수수께끼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같은 묘사방식은 그의 예전 작업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복귀’라는 제목은 이 인공적인 건물들이 다시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의미라고 한다. 비록 폐허의 외양을 띠고 있더라도 자연의,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된 우리 삶의 순환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존재는 왼쪽에 작게 묘사된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근 화면에서 자주 보이는 조그만 인간의 모습이 주로 아이를 업거나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작가의 자전적 모습을 투영한 듯한 이 어머니의 모습은,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넉넉함과 더불어 때로는 결연한 느낌까지 풍긴다. 아기를 안았다는 것은 단순히 모성적인 차원의 표시만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인 전망을 암시하는 듯하다. 삶의 조건은 앞으로도 별로 변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는 것이며, 지속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관리되는 공포>에서 동굴의 비현실적인 묘사는 <복귀>에서의 횟집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서 동굴의 화려함과 기괴함에 비해 사람의 모습은 언뜻 초라해 보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동굴 내부의 광경은 사회구조의 투영일 수도 있고, 생존의 조건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비판이나 비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응시에 가깝다. 확실히 유머는 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넉넉한 시선은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좀더 우회적인 길을 통해 삶의 모양새를 그려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방정아의 작업은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넘어서 타인과 내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지평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에 다가가고 있다. 그전보다 명확성과 직접성은 줄어들었고 통렬함이나 섬세함도 다소 약화되었지만 다른 것을 얻고 있다. 보다 거시적이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좀더 존재론적인 문제를 담아낸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일상의 가벼운 터치에서 꽤나 멀리 나온 것이지만 그만큼 깊이를 획득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소통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밖에 이번 전시의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작가가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업들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모두 3편의 애니메이션이 보여진다. 드로잉적인 기법을 통해 담담한 일상을 그려내는 모노톤의 작업과 사진작업을 바탕으로 해서 동료 작가들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것, 그리고 색채를 넣은 뮤직비디오 작업이 그것이다. 이중 특히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플래시 작품은 회화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섬세한 감수성이 살아있는 소박한 작업이다. 새로운 매체를 도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테크놀러지 지향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플래시 작업들은 아직 어떤 통일된 주제의식이나 다듬어진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시선과 언어를 조금씩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