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아-관세음보살이 된 화가
박영택(경기대학교교수,미술평론)
방정아는 그림 안에 사인(이름)과 함께 반드시 제목을 적고 있다. 달필로 쓱쓱 그려진 그림에 붙은 이 경쾌하게 쓰여진 글자, 제목은 마치 전통 동양화에 기재된 화제(畵題)와도 같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느낀 감흥을 시의(詩意)가 듬뿍 담긴 문장으로, 뜻이 의미심장하고 자구가 정연한 제발로 담아 시와 그림, 글과 이미지의 결합을 꾀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대부문인들에게 그림(시서화)이란 결국 자신의 삶의 소회를 드러내고 인생과 현실에 대한 비판, 자신들이 세계관, 가치관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문인들이 그림을 그리고 제발을 적어 넣는 일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본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려진 형상에 덧대어 자신의 심흉을 드러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서화’는 당연히 하나로 융합되어 표출되었다. 방정아의 경우 그림과 제목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림은 우의로 가득하고 그 제목은 하나의 단서로 다가온다. 그림의 제목은 작가 자신이 보고 느낀 세계에 대한 주석과도 같고 그에 기생해 써나간, 그려나간 흔적이다.
방정아의 그림 안에 들어간 제목은 주제의식, 그리고 형상의 내용을 보충해 주거나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작가에게 그림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드러내는 편이다. 그림 그리는 주체의 시선과 현실인식을 발화하는 것이다. 그 제목들을 하나씩 읽으며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림을 보면서 그 제목과 부단한 연관을 궁구하게 된다. 방정아에게 그림은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걸려든 모든 것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억해두고 다시 상기하며 반추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겪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그림 안으로 호명된다.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이 보았던 것, 보고야 만 것, 그렇게 치명적인 상처 같고 불에 데인 것 같은 것을 보고 난 자리에 떠도는 분노나 번뇌가 그림을 이룬다. 근래에 우리 사회나 정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이 작가로 하여금 더욱 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생각이다. 화면 위로 눈처럼, 비처럼, 벼락처럼 무엇인가가 내린다. 마음과 인식의 흔적을 뒤따르는 속도감 있는 붓질이 화면을 덮어나가고 요체만을 건져 올리는 시선의 힘은 모종의 상황을 함축한 도상화로, 현실에 대한 작가의 착잡한 마음들은 쫀득하게 달라붙는 물감의 점성으로 밀착되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과 그림, 예술과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방정아의 그림은 일관된 힘을 뼈처럼 지니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세상과 현실에 대해 '발언'한다. 따라서 그림은 단어이자 문장이고 결정적인 화면 하나로 자족한다. 이미지 하나, 한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 전달하는 압축과 '일러스트'적인 요약은 그림을 텍스트화 한다. 이 이야기그림은 초기부터 거의 변함없이 전개되며 그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작가 자신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드러내는, 다분히 자기성찰적인 그림이 그것이다. 근작은 40대에 접어든 작가 본인의 여러 소회가 담담하게 드리워져 있다. 문득 젊은 날이 지워져가는 시간대에 서서 여러 회상에 가라앉거나 다소 지치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바다를 배경으로, 바람 부는 풍경 앞에 서 있는 식이다. 이러한 성찰적 의식은 자연스레 화가, 혹은 예술가란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번진다. 자의식으로 혼곤한 그 그림들은 오늘날 그림 그리는 일, 화가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작가란 존재는 그 시대의 지진계이자 당대의 모든 삶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해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응하는 이라는 인식은 방정아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려온 모든 그림들은 그런 맥락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동안 방정아의 그림은 마치 르뽀르타쥬적 시선을 드러내왔다. 현장문학마냥 자신의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 그로인해 번지는 감정들을 즉각적으로 형상화해왔다. 빠른 붓놀림과 내러티브적인 그림은 그런 이유에서 이다. 근작에는 이런 인식이 관세음보살로 연결되어 은유성이 농후한 그림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은 작가 자신, 예술가란 존재와 등치된다. 화려하고 관능적인 옷차림에 화관과 영락을 걸치고 있는 관세음보살은 검은 강과 검은 땅위에, 사창가에, 일상의 공간에 도시에 출몰한다.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한다는 이 보살을 작가는 예술가란 존재와 겹쳐낸다.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는 관세음보살이란 존재가 오늘날 더욱 필요해서일 것이고 오늘날 예술이, 예술가들이 그런 아픔을 치유하고 보살피고 쓰다듬어주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묻어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과 창녀와 작가 자신으로 오버랩 되어 등장하는 인물, 여성들은 한결같이 수인과 같은 손가락의 모양을 달리해서 등장한다. 물을 건져올리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마음의 굴곡들을 섬세하게 지시하는, 내용과 형식을 균형잡는 그 손가락의 자태가 그림을 상당히 신비스럽거나 수수께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장치는 이전 작업에 비해 좀더 두드러진다는 생각이고 그림의 우의성 역시 짙어지고 있다. 그만큼 내밀한 발언이랄까, 현실에 대한 상념이 좀 복잡하고 까다로워진 것도 같다.
그 다음으로는 일상의 정경을 유심히 관찰해서 그 장면을 불현듯 낚아 챈 그림이다. 방정아의 눈은 일상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모든 삶에서 어떤 균열과 상처를 집어낸다. 그녀의 눈은 핀셋과도 같다. ‘콕’ 집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상으로 매만져 놓는다. 비근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의 에피소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시선들이 조밀한 그림이다. 나로서는 그림 이면에 깃든 이 작가의 관찰력, 눈이 응시하는 장면이 흥미롭고 어디지 쓸쓸한 여운이 감도는 부분이 좋다. 그런 연장선상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도 방정아만의 힘이다. <설치는 녀석들>, <검은 강, 검은 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은 그 제목부터가 동시대 한국 사회의 여러 현황과 현실에 대한 강한 메타포로 이루어져있다. 작가는 말하기를 요즘 사회 상황들이 뭔가 뒤죽박죽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고 종잡을 수 없다고 한다. 특히 4대강 사업 같은 경우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다며 이처럼 "모든 선들을 직선화, 단순화시키고 인간이 편의 중심"으로만 작동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 비판, 우려를 표출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그림들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미약하나마 이 시대에, 오늘날 화가란 존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되는 일을 새삼 생각해본 것 같다. 당대 현실에 대한 은유적 발언, 치유적 미술에 대한 시도,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작가상(관세음보살) 등을 암시하는 근작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 같다. 그 아픔과 상처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여전히 그녀만의 화법으로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