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것 : 뼈, 근육 그리고 눈물
김만석
‘무언가’가 될 때는 그냥 되는 법이 없다. 되는 것(be-coming)은 존재(be)가 새롭게 오는 것(coming)이니, 그것은 정말로 엄청난 사건이 분명하다. 경천동지란 바로 이런 사태를 일컫는 것일 터. 물론 어떤 무언가의 새로운 출현이 반드시 세계 전체의 격변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일상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없거나 잘 지각되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소한 삶에서도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몸은 그러한 생성의 최전선일 터이다.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몸, 뼈와 근육 그리고 피가 무언가가 되도록 만드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
회화 역시 어떤 형상이 캔버스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회화적 뼈와 근육, 피가 잘 돌아야 생기와 온기가 형성되고 그것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림이 ‘되는’ 것은 온 몸의 운동을 경유할 때에야 겨우 가능해지며 그러한 각고의 운동을 통해 캔버스에는 가까스로 어떤 시간의 두께가 쌓인다는 말이다. 이미 있는 것의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 그러므로 형상의 반복 그리고 그 반복 내에 깃든 차이가 세계의 문턱을 형성할 것이다. 회화적 되기란 그런 점에서 이중의 운동을 동시적으로 경유해야만 한다. 캔버스의 바깥에서 접속하는 그리기의 에너지와 캔버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적 뼈와 근육 그리고 피 말이다.
따라서 방정아가 걸어온 회화적 반복들은 무엇인지를 그것이 어떤 문턱을 넘는 차이인지 물어야 한다. 일상과 일상을 사는 존재들은 방정아의 그림에서 매우 중요한 반복이다. 이 반복이 이번 작업에서는 (젖어 사용할 수 없게 된 연탄을 활용한) 마티에르라는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의미심장한 방식이다. 연탄은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항상 불꽃과 만남으로서, 타오르거나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으로 다른 세계를 생성한다. 그러나 연탄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여름 장마로 젖어버린 것으로, 더 이상 무언가로 되기 어려운 것으로 버려질 수 있었지만, 이를 회화적으로 도입하여, 타오를 색으로 전환한다.
그러니까, 방정아는 연탄의 타오름이 대체로 소진으로 끝나버리지만, 방정아는 이를 강렬한 색과 접속시킴으로써 회화적 불꽃으로 전환시킨다. 이 회화적 연탄을 통해 방정아는 캔버스 속 인물들(이미 저물어가는 중년들이나 타올라야 하지만 울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여, 그들의 삶과 생을 그 어떤 것들로 치환할 수 없는 독특한 삶으로 만든다. 즉, 방정아는 식어버린 존재들에게 뼈와 근육 그리고 피를 제공함으로써, 그 존재들을 불꽃으로 (재)발명하는 캔버스를 조성한다. 그래서 이 캔버스가 생산하는 열기가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달리 생산할 수 있다(다른 것)고 생각하는 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