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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ST REVIEW 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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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령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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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고요> 캔버스에 아크릴 91×116.8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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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Hall > 캔버스에 아크릴 181.8×259cm 2015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작가 방정아가 부산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기울어진 세계>(4.22~5.5)를 열었다.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고 삶의 리얼리즘을 여실히 드러낸다.

납작한 세계에 납작하게 매달리기

조선령 부산대 교수

방정아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 하나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보기보다 작가가 통과해온 시대의 두께들이 작품들과 공명하는 지점을 다소 거창하게 고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을 지켜봐온 사람이 느끼는 개인적인 의무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임무가 항상 비평적 임무에서 시작된다는 벤야민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불씨’와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작품을 시대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방정아의 1993년작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2015년작 <The Hall>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시대의 ‘공기’와 관련된 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라는 명칭이 아직 낯설지 않을 무렵 그려진 <바다 끝에 선 여인들>은 첫눈에도 시퍼런 결기로 뭉쳐있다. 날카로운 선과 강한 붓자국, 신경질적이지만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색채, 무게있는 볼륨감,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인물들의 배치가 보인다. 마치 뒤러의 <네 사람의 사도>를 연상시키는 이 구도는 거친 삶을 살아온 익명의 여인들의 육체에 기념비적 엄숙성을 부여한다. 화면 중앙에 비어 있는 공간을 둠으로써 인물들을 좌우로 나누는 조형적 배려를 하고 있음에도 결국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인물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인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심적인 에너지는 캔버스 틀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반면 이번 공간화랑 전시에 출품된 <The Hall>은 비어있는 공간이 없는데도 빈 공간이 무수히 발견된다. 아니 공간 그 자체가 스스로를 비워내는 것으로, 아니면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혹은 공간의 입체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듯하다. 볼륨감은 극소화되고 세계는 납작해졌다. 선은 더 이상 강렬하지 않고 뭉그러지고 으깨진 채 어디론지 방향 모를 곳으로 흘러내린다. 인물들은 마치 인체 데셍의 기초를 무시하듯 삐뚤게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파스텔톤이라고 하는 중성적이고 온화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아크릴 물감의 무딘 금속성 느낌이 극대화된 화면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포기한 채 제멋대로 발라진 물감들로 인해 무기력한 둔중함으로 응고된다. 이 같은 변화는 같은 전시에 출품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낯선 고요>에서 몇 개의 거친 붓질로 단순하게 나누어진 무의미한 면들은 역시 공간이 삭제된 납작한 세계를 보여준다. 박제된 사슴의 텅 빈 눈과 같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이 세계가 카드로 세워진 위장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자 어쩌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을 어떤 이행의 과정이며,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변화된 감수성의 차이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세계는 납작해졌다. 아감벤의 말처럼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이 극단적인 현실성의 사회는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노골적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꽉 차 있어서 동시에 아무런 의미도 소유하지 못한다. “대체가능성”이 모든 잠재성의 공간을 차지했다. 앞뒤와 두께를 가진 풍경 대신 들어선 깊이 없고 비밀 없는 장면들, 생명을 상실한 듯한 비유기적인 인물들은 그대로 오늘날의 세계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세계는 한편으로 사적인 것을 말소시켰지만 동시에 공동체 역시 삭제시켰다. <바다 끝에 선 여인들>에서 빈 공간은 인물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The Hall>에서 그러한 결합은 없다. 인물은 원근법 법칙에 들어맞지 않게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관된 크기도 없고, 적절한 장소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오려붙인 공간, 아니 차라리 공간의 부재라고 해야 할 어떤 것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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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두 작품 사이에 있었던 작가의 전시들 중에서, 필자는 2008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최된 개인전 <세계>를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꼽고 싶다. 이 전시가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The Hall>의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정아는 정확한 원근법적 공간 혹은 널찍한 하나의 장소를 등장시켰는데, 이러한 공간의 제시는 단지 그 공간이 와해되는 지점을 포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혹은 공간이 스스로를 말소하는 지점의 다른 이름임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었다. 작가는 언뜻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듯한,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발생한 보이지 않는 파국이 은밀하게 중심을 삼키고 있는 소름 끼치는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재개발구역>에서 그것은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로, <자연사>에서는 한쪽 구석에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로, <안 보이는 사람>에서는 불길한 녹색 연기로, <세계3>에서는 땅을 잠식하는 보라색과 회색의 덩어리들로 표현되었다. 모래사장, 풀밭, 도로, 하수구, 연기 등의 형태를 띤, 그러나 사실은 더 이상 공간이나 형상이 아닌, 흘러내리면서 화면을 지우는 이 덩어리들은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지워버리면서 세계를 납작하게 만드는 어떤 산사태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렇게 공간이 지워진 세계를 <기울어진 세계전>에서 만난다. <기울어진 세계전>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린다는 행위의 결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작품들은 마치 캔버스 표면 위에 기름처럼 얹혀서 화면을 기울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듯한 미끌미끌한 껍데기 같다. 두께 없고 방향 없고 중심 없는 이 그림들은 시대의 납작함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아니, 기묘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납작한 세계 속에서, 아니 세계에 ‘매달려’(납작한 세계 속에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리기’가 필요하다. <네…>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한 태도는 형식에서도 반향된다. 묘사가 필요없다는 듯이, 공간과 볼륨과 색채가 다 귀찮다는 듯이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 이러한 그림은 아감벤 말마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비선택’이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인 저항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방 정 아 Bang Jeongah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서대 디자인&IT 전문대학원 영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갤러리 누보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2년 부산청년작가상과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