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아-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전에서 선보이는 길이 7m의 대작 ‘그녀가 손을 드는 순간’. 아래는 방정아 작가.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길이 7m에 이르는 큰 그림에 온갖 인물과 풍경이 녹아있다. 뒷모습을 드러낸 중년 여인의 피 흘리는 손을 향해 여러 사람의 눈길이 쏠린다. 북한 여성, 분식집 여성, 노인들, 동료 예술가 등 다른 체제의 사람이 한데 모인 장면은 초현실적 세계를 이룬다. 물이 흐르는 분수와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은 바다, 언덕과 함께 사람들처럼 이질적이다.
부산시립미술관(관장 김선희, 부산 해운대구 우동)은 현 시대 한국미술의 중심에 서 있는 중진 작가의 저력을 알리는 ‘현대미술작가 조명’ 기획전을 마련했다. 그 첫 순서로 부산에서 활동 중인 방정아(50) 작가를 선정했다. 방 작가는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80년대는 민중미술 2세대로, 1990년대 리얼리즘 회화로 작업을 시작했다.
지역 활동 중진 방정아 작가
부산시립미술관서 기획전
길이 7m 대형 회화 작품 포함
120여 점 5개 섹션 나눠 구성
일상부터 노동· 환경 영역 확장
작가의 사회·현실 인식 엿봬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이란 타이틀로 마련된 이 전시를 위해 방 작가는 앞서 언급한 ‘그녀가 손을 드는 순간’이란 대작을 제작했다. 전시실 한 곳 전체가 이 작품 하나를 위해 ‘신작 방’이란 이름으로 배정됐다.
벽면 가득히 채운 평면 회화 속의 분수와 붉은 기둥들이 그림에서 걸어 나와 공간을 입체로 채우고 있다. 가상과 실제가 혼재한 장소에서 관객도 어느 순간 그림 속 인물 중 한 명이 되어 피를 흘리는 손을 든 여인을 바라보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6월 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는 방 작가의 작품 120여 점이 5개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30년 가까운 작품 활동의 중간 결산이며, 화풍(畵風)의 변화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 첫 섹션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는 사회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자력발전소가 보이는 횟집에서 바다를 쳐다보며 회식을 즐기는 일행의 모습을 표현한 ‘핵헥’은 제목처럼 답답하다. 고급 카페와 위락시설, 아파트로 가득 채워진 고리 원전 일대에서 받았던 충격이 기억의 창고 문을 박차고 나오는 기분이다.
‘치열하였다, 그리하였다’ 섹션은 한국 여성의 삶, 특히 아줌마들의 애환을 풍자와 애정으로 풀어낸다. ‘급한 목욕’ ‘집나온 여자’는 가정 폭력에 대한 예민한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들이다. 그 안에는 역시 한국의 여인으로 살아온 작가의 삶이 시간에 따라 나열된다. 관세음보살상이 등장하는 ‘불편하게 다독이는’ 코너는 작품 전체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당대의 고통과 아픔을 절실히 느끼는 관세음보살상이 예술가의 은유로 발현됐다는 점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떠올리게 한다.
‘없으면 됐고요, 있으면 좋고요’는 사람들의 삶에서 위트와 유머를 전하거나 일상을 낯선 시선으로 경쾌하게 그려낸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확장된 세계’는 작가의 눈길이 인간의 형상에서 자연, 환경으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파트이다. 가로 4m의 대작인 ‘복귀’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과 물의 생명력, 자연의 치유력을 강조한다.
방 작가는 “일상만을 다루기엔 이 세상이 한가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명과 자연의 격한 대립, 시대적 상황, 사회현상으로 시선이 옮겨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박진희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방 작가는 국내를 넘어 외국에서도 주목하는 부산의 작가”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보편성과 지역성을 아우르는 ‘작가 방정아’를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작가로 재발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방정아-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6월 9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본관 3층 전시실. 051-744-2602.
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